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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폐기되는 혈소판 12만 명분, 헌혈 감소 뒤에 숨겨진 '유통기한'의 구조적 모순

대한적십자사는 2026년 6월 기준 전국 혈액 보유량이 적정 수준의 3.2일치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겨우 3일, 이 숫자는 뉴스에서 자주 보던 '위기' 수준이다. 그런데 아이러니가 있다. 같은 달, 적십자사는 유통기한이 지난 혈소판 수만 명분을 폐기했다. 피가 부족하다고 난리인데, 피를 버리고 있다.

이 역설은 단순한 행정 실수가 아니다. 혈액 관리 시스템의 구조적 모순, 그리고 '헌혈'이라는 행위를 바라보는 우리 사회의 오래된 착각이 겹쳐서 만든 결과다.

혈액원 냉장고의 혈소판

버려지는 피와 수요의 착시

혈액은 하나의 제품이 아니다. 전혈, 혈장, 혈소판, 적혈구 등 성분마다 보존 기간이 다르다. 적혈구는 35일, 혈소판은 불과 5~7일. 혈소판은 채혈 후 닷새 안에 환자에게 수혈되어야 한다. 이 짧은 유통기한이 시스템의 첫 번째 균열이다.

공급 과잉이 곧 공급 부족을 낳는 구조

혈소판 수요는 예측이 거의 불가능하다. 백혈병 환자의 갑작스러운 출혈, 대형 수술, 사고 현장. 수요는 특정 시점에 폭증한다. 하지만 공급은 헌혈자의 하루 일정에 달려 있다. 그래서 혈액원은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혈소판을 과다 보유하려는 유인을 가진다. 보유량을 늘리면 폐기량도 늘고, 보유량을 줄이면 부족 사태가 난다.

2025년 한 해 동안 적십자사가 폐기한 혈소판은 약 6만 유닛이었다. 1유닛에 2명의 헌혈자가 필요하다고 볼 때, 12만 명의 헌혈이 헛수고가 된 셈이다. 이 숫자는 매년 반복된다. 부족과 폐기는 동전의 양면처럼 공존하며, 혈액원은 그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있다.

헌혈하는 시민의 손

헌혈자의 심리와 '피의 상품화'

정부는 혈액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헌혈은 생명을 구하는 고귀한 행위'라는 프레임을 오랫동안 강조해 왔다. 이 프레임은 분명 헌혈 참여율을 끌어올리는 데 기여했다. 대한적십자사에 따르면 2025년 연간 헌혈자는 약 270만 명. OECD 국가 중에서도 높은 수치다.

헌혈증서의 그림자

하지만 그 이면에서 헌혈증서는 암시장에서 거래되고 있다. 수혈이 필요한 환자 보호자는 돈을 주고 헌혈증서를 산다. 헌혈자는 현금 대신 증서를 받고, 증서는 다시 유통된다. 이 시장은 불법이지만 수십 년간 존재해 왔다. 사람들은 '생명을 구한다'는 이상과 '피를 판다'는 현실 사이에서 모순된 태도를 보인다.

실제 헌혈장에서 헌혈증서를 매입하는 이른바 '브로커'가 여전히 활동 중이라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이는 헌혈이 순수한 이타심의 산물이라는 통념을 흔든다. 피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증서를 팔기 위해 헌혈하는 사람들이 시스템의 빈틈을 파고드는 것이다.

노인 환자 수혈 장면

고령화가 바꾼 혈액 수급 지형

혈액 수급의 진짜 위기는 눈앞에 다가온 인구 구조 변화다. 수혈이 가장 많이 필요한 질환은 백혈병, 재생불량성빈혈 같은 혈액암이다. 이 질환의 발병률은 70대 이후 급격히 높아진다.

헌혈 인구는 줄고, 수요 인구는 늘고

2025년 기준 65세 이상 노인의 헌혈 가능 연령은 원칙적으로 제한된다. 16~69세만 헌혈할 수 있고, 65세 이상은 기존 헌혈 경험이 있어야만 가능하다. 반면 수혈 수요는 70대 이상에서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2025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료에 따르면 수혈 건수의 41%가 70대 이상 환자에게 집중되어 있다.혈소판

헌혈 가능 인구는 매년 약 1.2%씩 줄고, 수혈 수요 인구는 약 2.5%씩 늘고 있다. 이 추세가 유지되면 2032년경 혈액 수급은 구조적 적자에 들어선다. 일시적인 캠페인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피를 나눌 젊은 세대는 줄어드는데, 피를 필요로 하는 노인 세대는 늘어나는 시간차가 시스템을 압박하고 있다.

해외의 새로운 접근: 피를 사지 않는 사회의 실험

우리나라를 포함한 대부분 국가는 무상 헌혈 원칙을 고수한다. 세계보건기구(WHO)도 유상 헌혈을 권장하지 않는다. 하지만 현실은 무상이라는 이상과 유통의 현실이 충돌하고 있다.

일본의 사례가 주는 시사점

일본은 2024년부터 '혈소판 수요 예측 시스템'을 도입했다. 병원별 수술 일정과 환자 상태를 실시간으로 연동해 혈소판 발주량을 예측하는 방식이다. 도입 후 첫 해, 일본 적십자사의 혈소판 폐기율은 8.2%에서 4.7%로 감소했다. 공급량을 줄였는데도 부족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다. 데이터가 폐기의 역설을 해결한 것이다.

또한 일본은 2023년부터 '헌혈 사전 예약제'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헌혈자가 몰리는 주말에 병목이 발생하지 않도록, 혈액원이 실제로 필요한 성분과 수량을 제시하고 원하는 시간대에 헌혈자가 방문하는 방식이다. 이는 '피가 부족하다'는 광고성 호소 대신, '지금 이 시간에 A형 혈소판이 필요하다'는 구체적 수요를 전달함으로써 헌혈의 효율성을 높였다.

우리는 여전히 '헌혈하면 사람을 살린다'는 추상적 슬로건에 의존하고 있다. 하지만 그 슬로건은 헌혈자가 피를 내놓은 뒤 그 피가 어떻게 쓰이고, 얼마나 버려지는지를 알려주지 않는다. 헌혈자에게 자신의 피가 폐기되었을 때 느끼는 허탈감은, 다음 헌혈을 망설이게 만드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조사 결과도 있다.

당신의 피, 정말 누군가를 살렸는가

우리는 매년 반복되는 '혈액 부족' 뉴스를 보며 헌혈을 독려받는다. 하지만 그 뉴스가 말하지 않는 진실은, 버려지는 피가 부족한 피만큼이나 많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 폐기의 책임을 개인의 이타심 부족으로 돌리는 순간, 시스템의 모순은 더욱 공고해진다.

헌혈 문화의 지속 가능성은 단순히 '더 많이 헌혈하자'는 캠페인이 아니라, '헌혈자의 피가 어떻게 관리되고, 어디에 쓰이며, 왜 버려지는지'를 투명하게 공개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헌혈율이 높아도 폐기가 많으면 결국 기부자의 신뢰는 무너진다. 피가 부족한 사회가 아니라, 피 관리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한 사회가 문제인 것이다.

과연 우리는 다음 혈액 부족 사태 때, 단순히 '헌혈자가 줄었다'는 뉴스만 보게 될까. 아니면 그 뒤에 숨겨진 폐기와 관리의 문제를 질문할 수 있을까. 당신이 나누는 그 붉은 액체가 정말 당신의 이타심이 닿아야 할 사람에게 도달하고 있는지, 의심할 수 있는지가 진짜 질문이다.

#혈액부족 #혈소판폐기 #헌혈문화 #고령화 #혈액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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