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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이슈
 

폐의약품 1,200톤, 뉴스가 말 안 해주는 '버려지는 약'의 구조적 딜레마

한 해 동안 한국 가정에서 버려지는 폐의약품이 1,200톤을 넘어선다. 이는 성인 기준으로 약 6억 정(錠)에 해당하는 양이다. 그런데 우리가 모르는 사실은 이렇게 버려진 약 중 절반가량이 개봉조차 되지 않은 '그대로의 약'이라는 점이다. 의료기관에서 처방된 약 중 40% 이상이 환자에게 전달된 후 복용되지 않고 폐기된다는 해외 연구 결과도 있다. 우리는 왜 이렇게 많은 약을 사면서도 먹지 않고 버리는 걸까. 단순히 '환자의 무책임'으로 치부하기에는 그背后에 시스템의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

쓰레기통에 버려진 알약들

약을 버리는 구조적 이유: 과잉처방과 '안전'이라는 이름의 낭비

가정에서 버려지는 폐의약품의 가장 큰 원인은 과잉처방이다. 급성 감기 환자가 병원을 방문하면 항생제, 소염진통제, 위장약, 해열제 등 4~5가지 약을 한 번에 처방받는 것이 일상적이다. 문제는 이 중 상당수가 증상 완화 후에도 남는다는 것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 자료에 따르면 급성상기도감염 환자에게 한 번에 처방되는 약품목 수는 평균 4.2개에 달한다.

처방전의 '관행'과 환자의 '불안'이 만드는 잉여 약

의료계의 관행적 처방은 '약을 안 주면 다시 오지 않을까'라는 불안에서 비롯된다. 환자 역시 "약을 적게 받으면 치료가 제대로 안 되는 것 아니냐"는 심리가 작동한다. 더 중요한 구조적 문제는 의사가 처방하는 약품목 수가 많을수록 진료비와 약제비가 상승하고, 이는 의료기관의 수익과 직결된다는 점이다. 무의미한 약이 처방되는 '좀비 처방'이 시장 논리에 의해 유지되는 셈이다.

약국 폐의약품 수거함 앞 고민하는 손

유통기한의 역설: 재고 폐기와 수급난의 동시 발생

제약회사와 약국에서도 매년 수백억 원 상당의 약이 버려진다. 유통기한이 남은 약이지만, 안전성 검증 기준이 지나치게 보수적이기 때문이다. 한 제약사 관계자는 "유효기간은 실제 약효가 소실되는 시점보다 1~2년 앞당겨 설정된다"며 "엄격한 기준으로 인해 재고 폐기량이 늘어나지만, 이는 어쩔 수 없는 안전장치"라고 말한다.

소아용 해열제 대란, 그날 무슨 일이 있었나

2023년 초 소아용 해열제 수급 대란은 이 딜레마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아이들은 열이 나는데 약국에는 시럽형 해열제가 없었다. 그러나 당시 제약사 창고에는 유통기한 임박으로 폐기 직전인 제품이 수십억 원어치 쌓여 있었다. 정부의 긴급 조치로 일부가 풀렸지만, '버려지는 약'과 '부족한 약'이 동시에 존재하는 기형적 구조는 여전하다.

소각장으로 향하는 폐기물 트럭

폐기 과정의 블랙홀: 소각되는 약과 오염되는 환경

수거된 폐의약품은 대부분 고온 소각된다. 소각 과정에서 발생하는 유해가스는 대기오염을 유발하고, 소각재에 남은 화학물질은 매립지로 이동한다. 환경부에 따르면 우리나라 폐의약품 소각 처리 비용은 톤당 120만~150만 원으로, 연간 처리비용만 15억 원을 넘는다. 이것은 '버려지는 약'의 문제가 단순한 자원 낭비를 넘어 환경 오염과 예산 낭비로 이어지는 복합적 구조임을 보여준다.뉴스가

선진국은 약을 '재사용'한다는데

스위스와 독일, 일본은 일부 의약품에 한해 '개봉하지 않은 약'의 재사용을 허용하거나 장려한다. 특히 일본은 의료기관과 약국이 협력해 미개봉 약을 회수해 저소득층 환자에게 재분배하는 '의약품 리사이클링' 시스템을 운영 중이다. 물론 보관 상태와 안전성 검증 절차가 까다롭다. 그럼에도 이들 국가는 폐기 비용보다 재사용 비용이 더 효율적이라는 판단을 내렸다. 우리는 모든 약을 무조건 폐기하는 '제로 리스크' 원칙에 매달린 나머지, 사실상 "안전하지만 낭비하는" 선택을 고집하고 있다.

의약품 관리의 새로운 패러다임: 도매 폐기에서 처방 혁신으로

결국 근본적인 해결책은 처방 단계에서 시작된다. 국내 일부 대형 병원이 도입한 '처방 최적화 시스템'은 환자의 복약 이력을 분석해 중복 처방과 불필요한 약제비를 실시간 차단한다. 이 시스템 도입 후 해당 병원의 약품비 절감 효과는 연간 30억 원에 달했다. 반면, 동네 의원급 의료기관은 인력과 비용 문제로 이런 시스템 도입이 사실상 불가능하다.

환자가 바뀌어야 시스템이 바뀐다

환자 인식 변화도 핵심이다. "약을 타놓고 안 먹으면 다음에 약을 더 강하게 처방해달라"는 요구, 처방전을 버리지 않고 보관하다 유통기한을 넘겨 버리는 행동 습관. 약이 '먹는 물건'이 아니라 '관리해야 할 자원'이라는 인식이 없다면, 아무리 정부가 폐기 수거함을 늘려도 근본적인 낭비 구조는 사라지지 않는다. 약은 쓰기 위해 만들어졌지, 버리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유통기한이 지났다'는 이유로 약을 버리면서, 그 유통기한이 과연 과학적으로 완벽한 기준인지 의심해본 적이 있는가. 우리는 약국에 폐의약품 수거함이 있는 것을 보며 '열심히 분리수거하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지만, 정작 수거된 약이 어떻게 처리되는지 궁금해한 적은 없는가. 결국 버려지는 1,200톤의 약은 우리가 매년 지불하고 있는 '안전'이라는 이름의 세금이다. 이 세금이 합리적인지, 우리는 좀 더 깐깐하게 따져 물을 권리가 있다. 당신의 가정에서 버려진 마지막 약 한 알은, 정말 먹지 않아도 될 만큼 불필요한 처방이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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