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나보고 소시오패스 같대요, 우리 언제부터 이렇게 '진단'에 진심이었죠?
어느 평범한 점심시간이었어요.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파스타를 먹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죠. 제가 업무 중에 겪었던 스트레스 상황을 무덤덤하게 설명하고 있는데, 친구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진지한 표정으로 묻더군요. "야, 너 혹시 소시오패스 아냐? 어떻게 그런 상황에서 감정이 하나도 안 섞일 수가 있어?"
순간 포크를 멈췄습니다. 농담 반 진담 반이었겠지만,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어요. 내가 정말 이상한 건가? 아니면 친구가 너무 과하게 반응하는 건가? 그날 이후로 저는 한동안 제 모든 행동을 검열하게 됐습니다. 누군가 슬픈 이야기를 할 때 적당히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지, 공감 능력이 부족해 보이지는 않는지 말이죠.
너 'T'야? 에서 시작된 우리의 낙인찍기
언젠가부터 우리 대화 속에는 심리학 용어들이 일상 언어처럼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가벼운 MBTI 열풍이었죠. "너는 T라서 그래", "나는 F라서 서운해" 같은 말들은 서로의 다름을 이해하는 귀여운 도구였습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이 도구들은 조금 더 날카롭고 무거운 단어들로 대체되기 시작했어요.
유튜브 쇼츠나 인스타그램 릴스를 넘기다 보면 '거러야 할 나르시시스트 특징 5가지', '주변에 이런 사람 있으면 무조건 도망치세요(소시오패스 구별법)', '성인 ADHD 자가 진단' 같은 콘텐츠들이 쏟아집니다. 전문의의 상담과 정밀한 검사가 필요한 병명들이, 단 몇 분짜리 영상 속에서 너무나도 쉽게 정의되고 소모됩니다. 우리는 이제 누군가의 성격을 '개성'이나 '특징'으로 보기보다, 어떤 '증상'이나 '장애'의 범주 안에 집어넣으려는 경향이 강해진 것 같아요.
복잡한 사람을 단어 하나에 가두는 편리함
왜 우리는 이토록 타인과 자신을 진단하고 싶어 할까요? 아마도 '불확실성'을 견디기 힘들어서일지 모릅니다. 누군가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마주했을 때, 그 사람의 살아온 환경과 내면의 복잡함을 들여다보는 일은 무척 에너지가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하지만 "그 사람은 나르시시스트야"라고 단정 지어버리면 상황은 아주 명쾌해집니다. 내가 받은 상처는 정당화되고, 상대방은 '치료받아야 할 대상' 혹은 '피해야 할 빌런'으로 고정되니까요.
실제로 제 지인은 얼마 전 초등학생 조카가 친구에게 "너 금쪽이처럼 행동하지 마"라는 말을 듣고 울면서 돌아온 걸 보고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TV 프로그램에서 육아 솔루션을 위해 쓰이던 용어가 아이들 사이에서는 서로를 비하하고 낙인찍는 욕설처럼 사용되고 있었던 거죠. 전문적인 진단명이 일상으로 내려와 타인을 배제하는 무기가 될 때, 우리 사이의 소통의 문은 조금씩 더 닫히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증상'이 아니라 '마음'을 궁금해할 순 없을까요?
물론 심리학적 지식이 대중화되면서 자신의 마음 상태를 인지하고 치료의 문턱을 낮춘 긍정적인 면도 분명히 있습니다. 우울증을 숨기지 않고 치료받거나, 자신의 주의력 부족을 인지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건강한 변화죠. 하지만 문제는 이 '진단'이 타인을 재단하는 잣대가 될 때 발생합니다.친구가
우리는 누구나 조금씩 이기적이고, 때로는 무심하며, 가끔은 지나치게 예민합니다. 감정이 메마른 날도 있고, 반대로 감정이 주체할 수 없이 소용돌이치는 날도 있죠. 이 모든 모습이 모여 '나'라는 입체적인 인간을 만듭니다. 그런데 이를 소시오패스, ADHD, 경계성 인격장애 같은 틀 속에 가두어버리면, 그 사람의 진짜 이야기는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됩니다.
만약 친구가 저에게 소시오패스냐고 묻는 대신, "그때 네 마음은 정말 어땠어? 무덤덤해 보이려고 애쓴 건 아니야?"라고 물어봐 주었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저는 제 내면의 깊은 불안이나, 당시 그 상황을 견디기 위해 감정을 억누를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털어놓았을 겁니다. 진단명은 대화를 끝내지만, 질문은 대화를 시작하게 만듭니다.
진단명 너머의 사람을 보는 연습
오늘도 우리는 수많은 '빌런 감별법' 기사와 영상을 접하며 살아갑니다. 하지만 세상에 완벽하게 정상인 사람이 어디 있을까요? 우리 모두는 각자의 결핍과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불완전한 존재들입니다. 타인을 어떤 카테고리에 분류하고 싶은 욕구가 들 때마다, 한 번쯤 멈춰 서서 생각해보았으면 좋겠습니다. 내가 지금 이 사람을 이해하고 싶은 건지, 아니면 단지 '낙인'을 찍어 내 마음의 편안함을 찾고 싶은 건지를 말이죠.
누군가에게 성급하게 진단명을 내리기 전에, 그 사람의 말 뒤에 숨은 떨림이나 눈빛에 담긴 진심을 먼저 읽으려 노력하는 다정함이 그리운 시대입니다. "너 혹시 이런 거 아냐?"라는 말보다 "그랬구나, 많이 힘들었겠다"라는 뻔하지만 따뜻한 공감이 더 큰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으니까요.
여러분은 최근에 누군가를, 혹은 스스로를 어떤 단어 속에 가두어버린 적은 없나요? 그 단어를 걷어내고 나면 무엇이 보일지 궁금해집니다. 내일은 진단명이 아닌, 그 사람의 진짜 이름과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