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왠지 모를 씁쓸함이 남을 때, 우리 우정에도 '가성비'가 끼어든 걸까요?
어제는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오랜 친구를 만났습니다. 강남역 근처, 예약 없이는 줄도 서기 힘들다는 파스타 맛집에서 1시간을 기다려 자리를 잡았죠. 서로의 안부를 묻고, 인스타그램에 올릴 사진을 몇 장 찍고, 요즘 유행하는 숏폼 영상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접시는 비어 있었습니다. 계산대 앞에서 아주 능숙하게 더치페이용 앱을 켜고 '1원 단위'까지 딱 맞춰 송금하는 친구의 손가락을 멍하니 바라보는데, 갑자기 명치 언저리가 체한 듯 묵직해지더군요.
분명 즐거운 시간이었는데, 왜 집으로 돌아오는 지하철 안에서 저는 허전함을 느꼈을까요? 곰곰이 생각해보니 그날 나눈 대화의 주제들이 모두 '정보 공유'나 '시간 때우기'에 가까웠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왕복 2시간의 이동 시간과 3만 원의 식사비, 그리고 주말 오후라는 기회비용. 머릿속 어딘가에서 '이 만남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었나?'라는 발칙한 계산기가 돌아가고 있었던 겁니다.
무심코 열어본 가계부 앱보다 무서운 마음의 계산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사람을 만날 때도 '효율'을 따지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외출 준비를 하는 시간, 교통비, 식사비를 합친 것보다 그 만남을 통해 얻는 정서적 위안이나 유용한 정보가 더 커야 한다고 믿는 것이죠. 만약 기대했던 것보다 재미가 없거나, 상대방의 고민 상담이 길어져 내 감정 소모가 커지면 '오늘은 손해 봤다'는 생각마저 듭니다.
이런 현상은 단순히 제가 예민해서 생기는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인간관계 정리'라는 키워드가 마치 대단한 자기관리의 상징처럼 여겨지기도 하니까요.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과감히 쳐내고, 소위 '결이 맞는' 사람만 골라 만나며 내 에너지를 아끼는 것. 그것이 현명한 삶의 방식이라고 추앙받는 분위기 속에서, 우리는 타인을 향한 인내심과 호기심을 조금씩 잃어가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 친구 만나서 뭐 해?"라는 질문이 아픈 이유
어느 날 한 지인이 제게 물었습니다. "별로 공통점도 없는 동네 친구를 왜 자꾸 만나? 시간 아깝게." 그 말에 저는 즉각적으로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정말로 그 친구를 만나서 대단한 영감을 얻거나 비즈니스적인 통찰을 얻는 건 아니었거든요. 하지만 그 '무용한 시간'이야말로 우리를 숨 쉬게 했던 것 아닐까요? 아무런 목적 없이 편의점 앞에서 캔커피 하나 들고 시시껄렁한 농담을 나누던 시절에는 가성비라는 단어가 끼어들 틈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친구와의 만남조차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하려 합니다. 예쁜 카페에 가서 사진을 건져야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미식가로서의 취향을 확인받아야 하죠. 만약 그런 '결과물'이 남지 않는 만남이라면, 왠지 모르게 시간을 낭비했다는 죄책감에 휩싸이곤 합니다. 우정이 마음의 나눔이 아니라, 투자 대비 수익(ROI)을 따지는 비즈니스 모델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은 아닌지 겁이 납니다.친구
손해 보지 않으려는 마음이 만드는 거대한 벽
이런 '관계의 가성비' 추구는 결국 우리를 더 외롭게 만듭니다. 손해 보기 싫어하는 마음은 곧 나를 방어하려는 기제로 작동하거든요. 상대방이 나에게 실례를 범할까 봐, 혹은 내가 상대방에게 너무 많은 것을 줄까 봐 적당한 거리를 유지합니다. 감정의 밑바닥을 보여주기보다는 적당히 정제된 모습만 보여주고, 깊은 고민보다는 가벼운 가십거리로 대화를 채우는 게 훨씬 안전하고 '효율적'이니까요.
하지만 진짜 관계는 바로 그 '비효율'에서 시작된다는 걸 우리는 잊고 삽니다. 친구가 밤늦게 울며 전화를 걸어올 때 내 수면 시간을 할애하는 것, 딱히 내 취향은 아니지만 친구가 좋아한다는 영화를 같이 보러 가주는 것, 길을 잃은 친구의 방황을 묵묵히 옆에서 지켜봐 주는 것. 이런 비효율적인 행동들이 쌓여 '믿음'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자산이 만들어지는 법인데, 우리는 지금 당장 내 주머니에서 나가는 시간과 감정의 단위에만 집착하고 있는 게 아닐까요?
가끔은 아주 비효율적으로, 낭비하듯 누군가를 사랑하고 싶어요
물론 모든 사람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쏟을 수는 없습니다. 나를 갉아먹는 관계에서 벗어나는 건 분명 필요한 일이죠. 하지만 적어도 내가 아끼는 사람들에게만큼은 '가성비 계산기'를 꺼두고 싶습니다. 그 사람과 함께 보낸 시간이 비록 생산적이지 않았더라도, 딱히 얻은 정보가 없더라도, 그저 함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 충분히 가치 있었다고 말해줄 수 있는 여유 말입니다.
오늘 밤에는 아주 오랜만에, 목적도 없고 용건도 없는 전화를 한 번 걸어보려 합니다. "그냥 생각나서 전화했어"라는, 세상에서 가장 비효율적이지만 가장 따뜻한 그 한마디를 건네기 위해서요. 여러분의 인간관계는 지금 안녕한가요? 혹시 여러분의 마음속에서도 자신도 모르게 엑셀 프로그램이 돌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한 번쯤 멈춰 서서 생각해보면 좋겠습니다. 진짜 소중한 것은 계산기로 두드려 평기할 수 없는 법이니까요.